음악이 시작되기 전의 춤 — Birmingham Hippodrome에서 만난 《Swan Lake-백조의 호수》
쉼표가 필요한 날이었다.
하루의 일을 마쳤는데도 생각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피곤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가도, 가만히 있으면 다시 오늘의 일들이 떠올랐다. 마음이 복잡했던 날 우연히 친구들과 버밍엄 Hippodrome에서 《백조의 호수》를 보게 됐다. 공연장에 가기로 한 것은 대단한 계획이 아니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는 그 우연이 꼭 내게 필요했던 시간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동안 발레를 보려면 런던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부분의 공연이 밤 늦게 끝나서 런던에서 1박을 해야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확히는 버밍엄에도 공연장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마음속에서는 늘 런던의 공연장부터 찾았다. 공연 한 편을 위해 기차를 타고 떠나는 즐거움도 있지만, 그러다 보니 집 가까이에 있는 버밍엄 히포드롬은 오히려 지나치고 있었다. 친구들과 자리를 찾아 앉으며 오늘은 어떤 무대를 만나게 될까 생각했다.
백조의 호수는 여러 버전으로 각색되어 공연이 이루어져 있는데, 이번 《백조의 호수》는 왕의 장례식으로 시작됐다. 첫 장면부터 어둡고 웅장했다. 아버지를 잃은 지그프리트 왕자는 깊은 슬픔 속에 있었다. 내가 막연히 떠올리던 화려한 연회와는 다른 시작이었다. 성에서 열린 모임에서 왕자는 활을 선물받고, 친구와 함께 사냥터로 향한다. 성을 떠나는 그를 따라가며, 이야기가 슬픔에서 어디로 움직일지 궁금해졌다.
2막의 호숫가는 성과 전혀 다른 세계였다. 어둡고 무거웠던 무대 뒤에 안개 낀 호수와 하얀 백조들이 나타났다. 이 색의 대비가 이번 공연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었다. 왕자가 그곳에서 만난 오데트는 로트바르트의 저주로 백조가 된 공주다. 밤에만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고, 진실한 사랑의 맹세만이 저주를 풀 수 있다. 왕자는 오데트와 사랑에 빠진다.
줄거리를 알고 보아도 오데트의 춤은 예상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그녀의 움직임은 부드럽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팔을 들어 올리는 짧은 동작에도 백조의 모습이 있었다. 하얀 의상을 입은 무용수를 보고 있으면서도 어느 순간 사람이 아닌 한 마리의 백조를 바라보는 듯했다. 말을 할 수 없는 오데트가 춤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기도 했다.
백조들이 함께 등장했을 때는 호숫가가 더욱 생생해졌다. 연기가 무대 아래로 흘러 강물이 되었고, 그 흐름 위에서 하얀 백조들이 움직였다. 나는 연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춤을 보고 있는 동안에는 정말 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백조들의 모습은 사랑스럽고 순수했다. 한 사람의 춤을 따라가다가 무대 전체를 바라보게 되고, 다시 오데트에게 시선이 돌아왔다. 그 장면을 보는 동안 복잡했던 머릿속이 맑은 물에 씻기는 기분이었다.
Royal Ballet Sinfonia의 연주와 춤이 만나는 방식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특히 음악이 시작되기 전, 무용수의 작은 움직임이 먼저 보이는 순간이 있었다. 단 몇 초였다. 그런데 그 짧은 고요가 내 시선을 무대로 끌어당겼다. 음악이 없는 춤에도 리듬이 있다는 것을 그때 느꼈다. 마치 춤에도 아카펠라가 있는 것 같았다. 움직임을 먼저 바라본 뒤 연주가 이어지자, 음악과 춤이 마치 듀엣을 부르는 것같이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주었다.
3막의 무도회는 호숫가와 다른 즐거움을 주었다. 왕자의 신부가 되려는 여러 나라의 공주들이 찾아온다. 무용수들은 공주마다 다른 성격을 춤과 표정으로 보여주었다. 어떤 몸짓에서는 웃음이 났다. 발레는 아주 여유 있는 사람들이 드레스를 입고 가서 조용히 보는 공연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내게도 있었는데, 무도회에는 풍자와 해학이 있었다. 대사가 없어도 인물의 개성이 보이고, 관객이 함께 웃을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자리에는 로트바르트가 준비한 속임수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딸 오딜, 검은 백조를 데리고 온다. 오딜은 오데트와 똑같은 모습으로 지그프리트에게 다가간다. 왕자는 그녀를 오데트라고 믿고 사랑을 맹세한다. 앞서 보았던 하얀 호숫가를 떠올리니 왕자의 착각이 더 안타까웠다. 무도회는 눈부시지만, 그곳에서 왕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
마지막 막에서 지그프리트는 속았다는 것을 알고 호숫가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오데트와 백조들은 로트바르트의 힘에 맞서고, 이야기는 비극으로 향한다. 이번 공연에서 두 사람이 함께 강물로 몸을 던지는 결말은 강렬했다. 다만 이 부분은 조금 서둘러 끝나는 듯해 아쉬웠다. 앞의 장면들을 천천히 따라온 만큼, 마지막에는 두 사람의 슬픔 곁에 조금 더 머물고 싶었다. 사랑의 끝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막이 내린 기분이었다.
그런데 공연이 끝나고 시간이 지나자 내게 남은 것은 죽음의 장면보다 강한것은 사랑의 장면이었다. 안개 낀 호숫가에서 함께 춤추던 모습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끝이 슬프다고 해서 그들이 사랑했던 순간까지 슬픈 것은 아니었다. 사랑을 다해 사랑한 그 순간은 영원히 지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시간이 돌아오지 않기에 더 간절하고 따뜻하게 남는 것 같았다. 사랑은 사랑이라서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무용수들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오데트와 오딜의 춤에 빠져 있으면 눈앞에 있는 사람이 무용수라는 사실을 잊었다. 백조를 보는 것 같다가, 다음 순간에는 저 움직임을 위해 얼마나 오래 연습했을까 궁금해졌다. 다른 출연자들도 저마다의 장면을 온몸으로 채우고 있었다. 저렇게 춤추는 일은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대 위에서 보이는 몇 분 뒤에 보이지 않는 긴 시간이 있다는 사실도 새삼 느껴졌다.
객석에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다. 영국에서 공연을 보러 가면 손을 잡고 함께 온 노부부나 친구들과 나란히 앉은 할머니들을 자주 만난다. 버밍엄 심포니홀과 뮤지컬 극장에서도 그 모습을 보았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공연이 끝나면 다시 함께 걸어 나가는 모습이 참 다정하다. 나이가 들어도 좋아하는 것을 찾아 나서고, 친구와 다음 공연을 약속할 수 있다는 것. 그 일상이 부러웠다. 나도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놓치지 않으며 나이 들고 싶다.
공연장을 나오며 가져온 안내지를 펼쳐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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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밍엄 Hippodrome에서 가져온 2026년 가을 공연 안내지.《백조의 호수》를 본 뒤 다음 공연들도 살펴보았다. |
《백조의 호수》는 2026년 9월 23일부터 10월 3일까지 공연된다. 이어 뮤지컬 《캣츠》가 10월 27일부터 11월 7일까지, 발레 《호두까기 인형》이 11월 20일부터 12월 12일까지 예정돼 있다. 2027년 2월 9일부터 13일까지는 《신데렐라》도 공연한다. 안내지에는 그 밖의 뮤지컬과 춤 공연도 빼곡했다. 어제의 공연이 막 끝났는데, 나는 벌써 다음에는 친구들과 무엇을 볼까 생각하고 있었다.
집 가까이에 이런 좋은 씨에터가 있었다. 그것을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된 것이 조금 아쉽지만, 앞으로 다시 찾아올 저녁이 생겼다는 것은 기쁘다. 공연을 보고 나온다고 삶의 걱정이 모두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어제는 어두운 성을 지나 하얀 호숫가에 도착했고, 음악이 시작되기 전의 짧은 춤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렇게 잠시 다른 세계에 머물렀다가 돌아오니, 다시 일상을 걸어갈 힘이 조금 생겼다. 내게 《백조의 호수》는 그런 쉼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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