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여성작가 문학 영향 시리즈 # 4 메리 셸리 – 바스(Bath)의 고딕과 번개


영국의 오래된 도시 바스(Bath)를 걷다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도시는 아름답고 우아한데, 그 우아함 뒤편에는 설명할 수 없는 적막과 그림자가 숨어 있습니다.

꿀빛 석회암으로 지어진 조지안 건물들, 비가 내린 뒤 더 짙어지는 돌계단의 색, 늦은 오후의 흐린 하늘 아래 조용히 이어지는 골목들.
바스는 제인 오스틴의 도시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곳에는 또 다른 여성 작가의 흔적도 남아 있습니다.

바로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Mary Shelley.

그녀는 단순히 ‘괴물 소설’을 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랑과 상실, 죽음과 인간의 외로움, 그리고 인간이 신의 영역까지 넘보려 하는 욕망을 가장 서늘하게 바라본 작가였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바스는 그런 그녀의 분위기와 닮아 있습니다.


번개가 지나간 뒤에 태어난 이야기

1816년, 유럽에는 유난히 춥고 어두운 여름이 찾아왔습니다.
화산 폭발의 영향으로 하늘은 잿빛으로 흐려졌고 사람들은 그 해를 “여름이 사라진 해(The Year Without a Summer)”라고 불렀습니다.

그해 스위스 제네바 호숫가에서 젊은 예술가들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마다 무서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메리 셸리는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됩니다.

죽은 육체가 전기의 힘으로 다시 움직이는 순간,  그 섬뜩한 상상은 결국 《Frankenstein》이라는 작품이 되었고, 현대 SF와 고딕 문학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삶 자체도 한 편의 소설처럼 외롭고 격정적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고, 사랑했던 남편 퍼시 셸리 역시 바다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메리 셸리의 문장은 단순히 무섭지 않습니다.
그녀의 글 속에는 “인간은 왜 외로운 존재인가”에 대한 긴 질문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읽어도 여전히 차갑고 슬프고 아름답습니다.


바스(Bath)를 걷다 보면 느껴지는 고딕의 그림자

Bath 는 런던보다 조용하고, 요크보다 부드럽고, 에든버러보다 우아합니다.  하지만 해가 천천히 기울기 시작하면 도시 전체가 아주 다른 얼굴을 보여 줍니다.

특히 비 오는 날의 바스는 놀라울 만큼 고딕적입니다.  젖은 돌길 위로 가스등 같은 노란 불빛이 번지고, 오래된 건물 창문에는 희미한 그림자들이 어른거립니다.  도시는 화려하기보다 오래된 기억처럼 남아 있습니다.

메리 셸리의 소설 속 분위기를 좋아한다면, 바스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감정으로 걷는 도시”처럼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바스에서 꼭 걸어봐야 하는 장소들

1. 로열 크레센트 (Royal Crescent)

Royal Crescent

바스를 대표하는 조지안 건축 거리입니다.
반달 모양으로 이어지는 건물들은 놀라울 정도로 우아하지만, 흐린 날 보면 묘하게 차갑고 낯선 분위기가 있습니다.

메리 셸리의 세계관과 잘 어울리는 장소입니다.  특히 해 질 무렵 걷다 보면 마치 오래된 영국 소설 속 인물이 된 기분이 듭니다.


2. 퍼트니 브리지 (Pulteney Bridge)

Pulteney Bridge

잔잔하게 흐르는 에이번 강 위에 세워진 아름다운 다리입니다.  비 오는 날 창백한 하늘 아래 바라보면 도시 전체가 오래된 유화처럼 보입니다.

근처 카페에 앉아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메리 셸리의 문장을 읽기 좋은 곳입니다.


3. 바스 수도원 (Bath Abbey)

Bath Abbey

높은 천장과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들어오는 빛은 경건하면서도 쓸쓸합니다.

고딕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공간의 침묵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조용히 앉아 있다 보면 인간의 외로움과 시간의 무게를 이야기하던 메리 셸리의 문장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왜 지금 다시 메리 셸리를 읽어야 할까

우리는 아주 빠르게 살아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기술은 점점 더 인간을 닮아 가고, 사람들은 더 완벽해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메리 셸리는 200년 전 이미 질문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 창조할 수 있는가.”
“외로움 속에서 버려진 존재는 어떻게 변하는가.”

그래서 《프랑켄슈타인》은 단순한 공포소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외로움과 책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바스는 그런 질문들을 아주 조용하게 떠올리게 만드는 도시입니다.


바스를 여행하기 가장 좋은 계절

개인적으로는 늦가을과 겨울 초입을 추천합니다.

조금 흐린 날씨와 차가운 공기, 오래된 돌건물 위로 번지는 노란 불빛이 메리 셸리의 분위기를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 줍니다.

너무 화창한 여름보다, 비가 조금 내리는 오후의 바스가 훨씬 더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여행은 때로 한 권의 소설이 된다

어떤 도시들은 사진으로 기억됩니다.
하지만 어떤 도시들은 문장처럼 마음에 남습니다.

바스는 그런 도시입니다. 그리고 메리 셸리는 우리에게 말하는 듯합니다.

인간의 어둠을 바라보는 일 역시 결국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비 내리는 바스의 골목을 천천히 걷다 보면, 당신도 어느 순간 오래된 고딕 소설 속 한 장면 안에 서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나의 노트

오월의 독백

물기를 머금은 짙은 연둣빛 오월이
조용히 나뭇잎 위로 내려앉는 오후,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를
천천히 걸어간다.

바람은 지나간 계절의 냄새를 흔들어 깨우고,
젖은 햇빛 아래 흔들리는 잎사귀들은
마치 오래전의 마음들을
가만히 불러내는 것만 같다.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갈망은
늘 가장 연약한 순간에 찾아와
조용히 발목을 붙든다.

그럼에도 내가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이 길의 끝에 다다르는 순간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을.

사람은 때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조차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단 한 번도 품어 본 적 없는 온기인데도,
마치 오래 잃어버린 것처럼
가슴 깊이 갈망하게 된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끝내 모든 것은 흘러가고,
손안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천천히 마음속의 무게들을 내려놓고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려 한다.

아무것도 없었기에
오히려 가장 자유로웠던 그곳으로.

그리고 이제는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기보다,
떠나가는 계절 앞에 조용히 서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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